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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의 고요함 속으로: 전통과 발효의 마을 이야기

📑 목차

    순창은 고요한 산속에서 시간이 익는 마을이다. 장독대마다 발효의 숨결이 살아 있고, 사람의 손끝에서 세대의 기억이 이어진다. 느림이 맛이 되는 순창의 발효 이야기.

    순창의 고요함 속으로: 전통과 발효의 마을 이야기

    전북 순창은 소리보다 향으로 기억되는 마을이다.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 시골길을 달리다 보면 들판 너머로 된장의 냄새가 흘러온다. 햇살은 부드럽게 장독대를 비추고, 바람은 콩 냄새를 머금은 채 마을을 돈다. 순창은 오래전부터 ‘발효의 고향’으로 불려왔다. 하지만 이곳을 직접 찾으면 금세 깨닫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맛의 문제나 관광의 이야기가 아니다. 순창은 ‘기다림’을 삶의 방식으로 품고 있는 마을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익어간다.

     

    순창의 고요함 속으로: 전통과 발효의 마을 이야기순창의 고요함 속으로: 전통과 발효의 마을 이야기순창의 고요함 속으로: 전통과 발효의 마을 이야기


    산과 강이 품은 발효의 마을

    순창은 산과 강, 그리고 바람이 만든 그릇 같은 마을이다. 구름이 낮게 내려앉은 새벽, 강물 위에는 안개가 피어오르고, 멀리서 들려오는 물소리가 마을을 깨운다. 장독대의 항아리마다 햇살이 비치면 반짝임이 일어난다. 그 안에는 콩과 물, 소금, 바람이 만나 만든 생명의 과정이 숨어 있다. 농부는 말했다. “장 맛은 흙과 바람이 만드는 거예요. 사람은 다만 도와줄 뿐이죠.” 그의 말처럼 순창의 발효는 인간의 손과 자연의 순환이 함께 만들어낸 결과였다. 순창의 공기는 맑고, 물은 부드럽다. 그 자연의 조화가 맛의 깊이를 결정한다.


    사람의 손이 만든 맛, 세월이 만든 향

    순창의 장은 정성과 인내로 빚어진다. 콩을 삶고, 으깨고, 네모난 틀에 눌러 메주를 빚는 일은 단순한 노동이 아니다. 그 안에는 ‘손의 기억’이 담겨 있다. 햇볕 좋은 날에는 메주가 바람을 맞으며 서서히 말라가고, 밤이면 서늘한 공기가 스며든다. 나는 장을 뒤집는 아주머니의 손을 바라보았다. 굳은살이 박인 손이지만, 움직임은 놀랍도록 섬세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두르면 장이 삐져요. 맛은 기다림이에요.” 순창의 장은 사람의 성격을 닮는다. 다정한 사람의 장은 부드럽고, 꼼꼼한 사람의 장은 진하다. 이 마을의 맛은 결국 사람의 성정이 만든 결과였다.


    새벽 장날, 삶이 익어가는 풍경

    순창의 새벽은 장날에 가장 분주하다. 아직 어둠이 걷히기 전, 마을 사람들은 짚신을 신고 시장으로 향한다. 손수 담근 된장과 고추장이 손수레에 실리고, 사람들은 담소를 나누며 걸음을 맞춘다. 시장 입구에서는 메주 냄새가 진하게 퍼진다. 상인들은 “이건 지난겨울 장이야.”, “이번엔 더 잘 익었지.” 하며 자랑처럼 말을 건넨다. 나는 구수한 냄새 속에서 한 노부부를 만났다. 두 분은 40년째 된장을 팔고 있었다. “된장은 아이 같아요. 매일 들여다봐야 하거든요.”
    그들의 웃음에는 삶이 배어 있었다. 순창의 시장은 단순한 거래의 공간이 아니라, 세월을 나누는 자리였다.


    순창전통발효마을, 문화가 살아 있는 공간

    순창의 전통발효마을은 발효의 중심지이자 교육의 장이다. 이곳에서는 된장, 고추장, 청국장, 간장 등 수백 가지 전통 장이 만들어진다. 하지만 중요한 건 그 과정이 모두 ‘보여진다’는 점이다. 체험관에서는 방문객이 직접 장을 담그며 발효의 원리를 배운다. 나도 찹쌀과 메주가루, 천일염을 섞으며 손끝의 감각을 느꼈다. 반죽이 손에 닿는 순간, 이 마을 사람들의 삶이 조금은 이해됐다. 직원은 말했다. “발효는 기다림이 아니라 신뢰예요. 자연을 믿어야 맛이 나요.”
    순창의 사람들은 자연을 통제하지 않는다. 대신 믿고 기다린다. 그것이 순창의 철학이었다.


    고추장으로 이어지는 전통의 맛

    순창의 대표는 단연 고추장이다. 매운맛과 단맛이 절묘하게 섞여 있고, 그 깊이는 세월이 만든다. 고추장 색은 계절마다 다르다. 여름에는 밝고, 겨울에는 짙다. 나는 한 장인의 집을 찾았다. 항아리 수백 개가 햇빛을 받으며 일렬로 서 있었다. 장인은 뚜껑을 살짝 열고 냄새를 맡게 했다. 짠맛, 단맛, 매운맛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는 말했다. “고추장은 욕심을 내면 안 돼요. 자연이 알아서 익어요.” 그의 눈빛엔 오랜 세월의 믿음이 담겨 있었다. 순창의 고추장은 단순한 양념이 아니라, 세대를 잇는 언어였다.


    세대를 잇는 손끝의 전통

    요즘 순창의 젊은 세대가 돌아오고 있다. 부모 세대가 남긴 항아리를 물려받고, 그 안에 새로운 꿈을 담는다. 어떤 청년은 발효식품을 현대 디저트로 만들고, 또 어떤 이는 ‘발효카페’를 열어 젊은 여행자에게 장의 가치를 알린다. 그들은 SNS로 홍보하고, 포장 디자인을 새롭게 바꾸지만, 본질은 지킨다. “기다림이 맛이에요.” 그 문장이 세대 간에 변하지 않는다. 나는 젊은 장인과 이야기를 나누며 느꼈다. 전통은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숨 쉬는 현재라는 것을.


    물과 흙, 바람이 완성하는 발효의 조화

    순창의 발효에는 사람만이 아니라 자연이 함께한다. 물은 부드럽고, 흙은 비옥하다. 낮에는 햇살이 장독대를 덮고, 밤에는 산바람이 항아리를 식힌다. 이런 조건 덕분에 순창의 장은 짜지 않고 향이 깊다. 나는 장독대 옆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항아리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이 내 몸에도 닿았다. 자연이 이 마을의 장인처럼 느껴졌다. 발효는 결국 인간이 자연의 시간을 빌려 쓰는 일이다. 순창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안다. 그래서 욕심내지 않고, 자연의 속도에 맞춰 산다.


    순창의 밤, 고요 속에 깃든 온기

    해가 지면 순창의 마을은 조용해진다. 하지만 그 고요함은 비어 있지 않다. 장독대 위로 달빛이 내리고, 항아리 그림자가 벽을 타고 흐른다. 사람들은 저녁을 마치고, 하루의 냄새를 손에 남긴 채 마루에 앉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 장독의 뚜껑이 살짝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순창의 밤은 모든 것이 쉬는 시간이 아니라, 발효가 가장 활발히 이루어지는 시간이다. 사람들은 말없이 그 소리를 듣는다. 세상에 이런 밤이 또 있을까 싶다. 조용하지만, 생명이 깨어 있는 밤. 그 속에서 순창은 오늘도 익어간다.


    결론 – 고요함 속에서 익어가는 삶의 향기

    순창은 말이 적은 마을이다. 그러나 침묵 속에 가장 많은 이야기가 있다. 장독대 위에서 익어가는 된장처럼, 사람들의 삶도 천천히 숙성된다. 발효는 음식이 아니라 삶의 은유다. 순창의 고요함은 단순한 정적이 아니라, 시간을 존중하는 마음이다. 나는 순창을 떠나며 그 냄새를 손에 새겼다. 구수한 향, 따뜻한 공기, 그리고 사람의 체온이 함께 섞인 냄새. 순창은 느림의 미학을 아는 마을이다. 그 고요함 속에서 사람들은 오늘도 자신만의 시간을 익혀 간다. 그리고 그 시간은 누군가의 기억으로, 또 하나의 전통으로 남는다.